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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여신'이라는 이름의 산,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가득한 음식" 또는 "풍요의 여신"을 뜻한다. 힌두교에서 굶주린 이들에게 밥을 퍼주는 여신 안나푸르나 데비를 그대로 산 이름에 옮겨온 것이다. 네팔 사람들에게 이 산은 오래전부터 마을에 곡식과 물을 내려주는 존재로 여겨져왔고, 지금도 안나푸르나 자락의 계단식 밭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로 꼽힌다.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의 페와 호수 앞에 서면, 물 위에 안나푸르나 연봉과 물고기 꼬리 모양의 마차푸차레가 그대로 비친다. 아시아에서 손꼽히게 사진이 많이 찍히는 산악 풍경 중 하나로, 이 장면 하나를 보러 포카라를 찾는 여행객만 해도 한 해 수십만 명에 이른다. 그런데 정작 이 "풍요의 여신"은 등반가들에게는 정반대의 이름으로 통한다. 8000미터가 넘는 세계 14좌 중에서, 정상에 오른 사람 대비 목숨을 잃은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은 산이 바로 안나푸르나다. 이름과 실제 사이의 이 낙차가 안나푸르나를 다른 8000m급 봉우리들과 조금 다르게 만든다. 에베레스트나 K2가 "누가 더 높이, 더 빨리 올랐는가"로 기억되는 산이라면, 안나푸르나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서 돌아오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항상 먼저 따라붙는 산이다. 안나푸르나가 세계 등반사에 처음 이름을 올린 건 1950년 6월 3일이다. 프랑스 원정대의 모리스 에르조그와 루이 라슈날이 정상에 올랐는데, 이는 인류가 처음으로 8000미터를 넘는 산을 밟은 순간이었다. 에베레스트 초등(1953년)보다 3년이나 앞선 기록이고, 원정대가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산도 안나푸르나가 아니라 다울라기리였다. 지도조차 부정확하던 시절, 정찰 끝에 뒤늦게 방향을 튼 게 오히려 인류 최초의 8000m 등정으로 이어진 셈이다. 문제는 내려오는 길이었다. 정상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쓴 두 사람은 해가 저물도록 하산하지 못했고, 눈보라 속에서 텐트를 찾지 못해 크레바스 안에서 밤을 지새웠다. 에르조그는 정상 등정 사진을 찍으려고 장갑을 벗은 채로 오래 서 있었던 탓에 손가락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 베이스캠프로 실려 내려온 두 사람을 기다린 건 마취제도 없이 진행된 현장 절단 수술이었다. 괴사를 막으려던 군의관은 에르조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라슈날의 발가락 대부분을 잘라내야 했다. 에르조그는 훗날 이 등정을 담은 책 《안나푸르나》에서 이 도전을 국가적 영광으로 그렸고, 책은 등반 문학의 고전이 되어 지금까지 1100만 부 넘게 팔렸다. 하지만 라슈날이 남긴 미공개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발가락에 이미 동상 기색이 뚜렷하던 정상 직전, 라슈날은 하산을 주장했지만 에르조그의 뜻에 밀려 결국 함께 정상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8000m 등정이라는 영광 뒤에는, 발끝의 감각을 걸고 내린 결정 하나가 있었다. 에르조그와 라슈날 이후로도 안나푸르나는 계속 사람의 목숨을 가져갔다. 2006년까지 누적 통계를 보면 정상을 밟은 약 150명 중 58명이 숨져, 등정 대비 사망률이 38.7%에 달했다. 세 명 중 한 명 넘게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다. 2011년 무렵에도 사망률은 여전히 30%를 웃돌았다. 기상 예보 정확도가 낮고, 눈사태 위험 구간을 우회할 만한 정보 자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장비와 기상 예보, 구조 체계가 발전하면서 최근 수치는 많이 낮아졌다. 2026년 초 기준 누적 등정 559회에 사망 75명, 사망률은 13.4% 선까지 내려왔다. 그래도 이 숫자는 여전히 8000m급 14개 봉우리 중 1위다. 비슷한 급으로 위험하다는 다울라기리(13%)보다도 근소하게 높고, 에베레스트(2.5%)나 마나슬루(2.4%)와 비교하면 대여섯 배에 이른다. 안나푸르나가 유독 위험한 이유로 전문가들은 눈사태 지대를 피해갈 안전한 루트 자체가 마땅치 않다는 점을 꼽는다. 다른 8000m봉들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구간을 우회하는 정석 루트가 있지만, 안나푸르나는 어느 쪽으로 올라도 눈사태에 노출된 사면을 길게 통과해야 한다. 안나푸르나는 한국 산악계에도 유독 깊은 생채기를 남긴 산이다. 1999년 4월, 산악인 지현옥이 이 산 정상에 올랐다. 지현옥은 1993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 대장으로 에베레스트에 올라 한국 여성 최초 기록을 세운 인물이었고, 1997년에는 가셔브룸1봉, 1998년에는 무산소로 가셔브룸2봉까지 올라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 기록을 연달아 갈아치우고 있었다. 안나푸르나는 그가 여성 최초로 도전한 또 하나의 8000m봉이었다. 하지만 정상을 밟은 뒤가 문제였다. 캠프3를 떠나 하산하던 지현옥은 북벽 7800미터 지점에서 연락이 끊겼다. 수색이 이어졌지만 시신도, 유류품도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여성 산악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그는, 그렇게 안나푸르나에 잠들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2011년 10월, 이번엔 박영석 대장이 이 산에서 실종됐다. 박영석은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 등정했고, 2005년에는 히말라야 8000m급 14좌와 세계 7대륙 최고봉, 남·북극점까지 모두 밟는 "탐험 그랜드슬램"을 세계 최초로 완성한 산악인이었다. 그가 이때 시도한 건 이미 다 오른 정상이 아니라, 안나푸르나 남벽에 누구도 오르지 않은 "코리안 신루트"를 새로 뚫는 일이었다. 후배 산악인 신동민, 강기석과 함께였다. 10월 18일 오후, 박영석은 베이스캠프에 위성전화로 마지막 교신을 남겼다. 날씨가 나쁘고 낙석이 많아 전진캠프로 내려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통화를 끝으로 세 사람 모두와 연락이 끊겼다. 수색대는 마지막 교신 지점 일대를 이 잡듯 뒤졌지만, 사고 발생 12일째인 10월 29일 공식 수색은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종료됐다. 남은 흔적과 교신 기록을 종합해 산악계는 세 사람이 하산길에 눈사태를 만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시대에 한국 산악사를 새로 쓴 인물이었고, 공교롭게도 둘 다 정상이 아니라 하산하는 길에서 이 산에 발이 묶였다. 안나푸르나에서 세워진 기록과 안나푸르나에서 멈춘 삶이, 같은 산 위에 나란히 새겨져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작 "안나푸르나에 간다"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은 정상을 노리는 등반가가 아니다. 매년 수만 명의 트레커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나 안나푸르나 서킷을 걷기 위해 이 산자락을 찾는다. 이 코스들은 4000~5000미터대 능선을 따라 도는 트레킹 길이라, 등정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롯지에서 자고 차를 마시며 걷는 이 길에서, 안나푸르나는 사람을 삼키는 산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풍요의 여신"에 가까운 얼굴을 보여준다. 같은 산이 이렇게 다른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산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로 돌아온다. 정상까지 몇 미터가 남았든, 지금 서 있는 곳이 하산하는 길이라는 걸 잊지 않는 것. 오늘 어느 산을 걷든, 그 감각 하나만은 안나푸르나가 남긴 교훈으로 기억해둘 만하다. 다음엔 또 어떤 산 이야기를 갖고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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