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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붙잡을 만큼 높은 산, 한라산
제주도 한가운데, 섬 전체를 굽어보는 화산이 하나 솟아 있다. 해발 1,947미터,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이다. 이름부터 스케일이 남다르다. 한자로 은하수를 뜻하는 '한(漢)'과 붙잡는다는 뜻의 '나(拏)'를 합쳐 한라(漢拏), 곧 은하수를 붙잡을 만큼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제주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창조 신화는 한발 더 나아간다.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 여신 설문대할망이 치마폭에 흙을 퍼담아 나르다가, 치마에 난 구멍으로 흙이 새어 떨어지면서 섬 하나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쌓인 흙더미가 하늘의 은하수에 닿을 만큼 높아졌다고 해서 이 산에 한라라는 이름이 붙었다. 흥미롭게도 이 신화는 산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설문대할망이 치마 밖으로 흘린 흙 부스러기들이 제주 곳곳에 자잘한 언덕으로 남았고, 사람들은 이걸 오름이라 부른다. 산 하나를 만드는 이야기 속에 섬 전체의 지형이 함께 들어있는 셈이다. 산에 처음 오른 사람이 아니라, 기록을 남긴 사람이 먼저 남았다 정작 이 산에 언제부터 사람이 올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탐라국 시절부터 한라산은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고, 산신에게 제를 올리는 일은 있어도 정상까지 오르는 걸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드물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등정기는 조선 선조 때 문인 임제가 남긴 남명소승이다. 1577년, 그는 지금의 영실 코스와 비슷한 길을 따라 정상까지 올라 그 여정을 글로 남겼다. 등산이라는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에, 누군가는 이미 이 산의 능선을 따라 걸으며 본 것을 기록했다. 이 작은 화산섬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한라산과 제주도가 정말 특별해지는 지점은 여기부터다. 2002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07년에는 세계자연유산, 2010년에는 세계지질공원으로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자연환경 분야에서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이 세 타이틀을 모두 갖춘 유네스코 3관왕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흔치 않다. 화산이 만든 크고 작은 오름 368개와 땅속을 가로지르는 용암동굴 160여 개가 섬 곳곳에 흩어져 있는 걸 생각하면, 이 작은 화산섬 하나가 왜 그런 평가를 받았는지 짐작이 간다. 세계자연유산으로 함께 묶인 성산일출봉과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까지 더하면, 제주는 한라산 정상 하나가 아니라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산 박물관인 셈이다. 정상까지 걸어 오르면, 사실상 한반도를 다 걷는 셈이다 한라산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식물이다. 해안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기후대가 통째로 바뀐다. 낮은 지대에는 남부 지방에서나 볼 법한 난대성 식물이 자라고, 조금 더 올라가면 중부 지방의 상록활엽수와 낙엽수림이 이어지다가, 정상 부근에서는 북쪽 고산지대에서나 만날 수 있는 관목과 초원이 펼쳐진다. 그래서 이 산은 한반도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남쪽 끝에서 시작해 몇 시간 만에 훨씬 북쪽의 고산지대 언저리까지 걸어 올라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산이다. 정상 부근에서 만나는 구상나무 군락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전 세계에서 한라산을 비롯한 한반도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크리스마스트리의 기원이 됐다는 이야기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정상의 호수엔 흰 사슴을 탄 신선의 전설이 남아 있다 정상에 오르면 그 보상으로 백록담(白鹿潭)이 기다린다. 둘레 3킬로미터에 이르는 화구호로, 이름 자체가 하나의 전설을 담고 있다. 옛날 신선이 흰 사슴, 백록을 타고 내려와 이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에서 그 이름이 붙었다. 사냥꾼이 실수로 백록을 쏘았다가 크게 뉘우쳤다는 설화도 함께 전해지는데, 신성한 존재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옛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화산 활동으로 생긴 분화구가 오랜 세월 신선의 세계로 여겨져 온 셈이다. 은하수를 붙잡을 만큼 높다는 산 이름부터, 신선이 다녀갔다는 정상의 호수까지, 한라산은 오르는 내내 신화와 마주치는 산이다. 그러면서도 성판악이나 관음사 같은 코스를 따라가면 하루 안에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을 만큼 문턱이 낮다. 지금까지 소개한 세계의 산들과 달리, 한라산은 국내에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직접 걸어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산만의 장점이다. 다음 제주 여행에서는 해안 대신 능선을 한번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은하수까지는 아니어도, 남쪽 바다부터 정상까지 이어지는 사계절을 하루 만에 만나는 경험은 이 산에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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