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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이미 다시 깨어나고 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시작되는 이 산은, 지금의 이름을 얻기 전까지 열 개 넘는 이름으로 불렸다. 중국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불함산이었고, 그 뒤로 단단대령, 백산,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영응산, 대백산, 장백산을 거쳐서야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자리를 잡았다. 정상 부근을 뒤덮은 흰 부석과 만년설 때문에 늘 머리가 하얗게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 중국이 쓰는 이름 장백산(長白山)도 뜻은 같다. 길게 이어진 흰 산이라는 의미다. 높이 2,744미터, 정상의 분화구에는 천지라는 호수가 있다. 지름 약 5킬로미터에 최대 수심 384미터, 세계에서 가장 깊은 칼데라호다. 화산이 폭발하며 산의 정수리가 통째로 내려앉아 생긴 구덩이에 물이 고인 것이다. 백두산을 하나의 산이 아니라 활화산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호수 밑에 있다. 국경이 되어버린 산 이 산을 둘러싼 갈등은 등반이 아니라 국경에서 시작됐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는 백두산 정상 부근에 정계비를 세워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기로 했다. 실제로 산에 오른 건 청나라 관리 목극등과 조선 측 하급 관원 몇 명뿐이었다. 목극등은 조선 측 정식 대표인 참판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산행에서 배제한 뒤, 조선과의 합의 없이 청나라에 유리한 위치에 비석을 세웠다. 이 정계비는 20세기 초 어느 시점엔가 사라졌고, 지금은 원래 위치를 두고도 해석이 갈린다. 국경을 정하려던 비석이 오히려 국경 분쟁의 불씨를 남긴 셈이다. 잠들지 않은 화산 이 산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국경이 아니라 땅 밑에 있다. 서기 946년 무렵, 백두산은 인류 역사에 기록된 화산 폭발 중 손꼽히는 규모로 터졌다. 이른바 '밀레니엄 분화'다. 분출한 화산재의 양은 40에서 98세제곱킬로미터, 화산폭발지수(VEI)로는 6에 해당한다. 2010년 유럽 항공 대란을 일으킨 아이슬란드 화산 분출량의 수백 배가 넘는 규모다. 그런데 이 분화의 가장 큰 흔적은 정작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에서 발견됐다. 분화가 겨울철 북서풍을 타고 일어나면서, 화산재 대부분이 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부와 홋카이도 일대에 두껍게 쌓였기 때문이다. 정작 화산의 주인인 한반도보다 바람 건너의 일본이 더 큰 피해를 입은, 지질학이 남긴 아이러니다. 그리고 이 화산은 잠들지 않았다. 2002년부터 2005년 사이, 천지 일대에서는 화산성 지진이 3천 회 넘게 발생했다. 많을 때는 하루에 백 번 넘는 군발지진이 이어졌고, 정밀 측량 결과 땅이 7센티미터 가까이 부풀어 오른 것도 확인됐다. 화산가스에 섞인 헬륨과 수소 함량은 평소보다 열 배 넘게 늘었다. 학자들은 이 신호들을 지하 3에서 5킬로미터 깊이의 마그마방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증거로 본다. 천지 주변 온천수 온도는 최근까지도 섭씨 69도에서 83도 까지 계속 오르고 있다. 다음 분화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산이 죽은 화산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름과 혈통을 둘러싼 다툼 북한에서 이 산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정치적 신화의 발상지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발표해 왔고, 이 계보를 '백두혈통'이라 부르며 체제 정당성의 뿌리로 삼는다. 그러나 옛 소련 시절 기록에는 그가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비야츠코예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한 나라가 산 하나를 통치 이데올로기의 발원지로 세운다는 것 자체가 이 산의 무게를 보여준다. 국경 다툼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4년 3월, 유네스코는 중국이 신청한 세계지질공원 목록에 이 산의 중국 쪽 이름인 '창바이산'을 올렸다. 북한 쪽 영역은 그 명단에 없었다. 한 산의 절반만 국제기구의 공식 명단에 오른 셈이었다. 뒤늦게 2025년 4월이 되어서야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북한이 영유한 남쪽 백두산까지 포함시켜, 비로소 산 전체가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됐다. 300년 전 정계비가 그랬듯, 이 산은 지금도 이름과 국경을 둘러싼 줄다리기 한복판에 있다. 정작 가장 못 가는 사람들 정작 이 산을 가장 오래 그리워해 온 건 한반도 남쪽 사람들이다. 분단 이후 남한 사람은 북한 쪽 백두산에 오를 방법이 없다.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중국을 거치는 것뿐이고, 그마저도 국경 너머 북한 땅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사진을 찍는 것조차 조심하라는 안내를 받는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지를 볼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정상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서, 어렵게 도착해도 안개에 가려 물 한 방울 못 보고 돌아서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지도 위에서 계획을 세우고, 다음 주말 어느 능선을 오를지 고르는 이 평범한 자유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한 번 오기도 힘든 일이라는 걸 이 산은 조용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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